2009년 02월 06일
말씀 0205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바울
행 20:24
# by | 2009/02/06 17:28 | 목회와 신학 - SML prjct | 트랙백 | 덧글(0)
# by | 2009/02/06 17:28 | 목회와 신학 - SML prjct | 트랙백 | 덧글(0)
# by | 2009/02/05 22:22 | 목회와 신학 - SML prjct | 트랙백 | 덧글(0)
에스겔 13:3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에스겔 13:6~7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그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저도 잘되는나 나오고 굉장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계 깨어있는 목회자및 리더들이 일어나서 이 책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고 일어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결론은 쉽사리 이단이다라고 판단내릴 수 없습니다.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귀기울여 주십시오.
위의 말씀은 제가 성경을 보다가 지금의 상황에 맞는 상황을 보여주시는 것 같아서
같이 나누고 싶었습니다.
긍정의 힘? 자기계발을 통해 성공하는 나?
이런 책은 경제논리와 결합해 나오는 수많은 자기계발서 란에 꽂혀야 하지 않을까요?
말씀에서 너무 빗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긍정의 하나님이시며 우릴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심리적인 긍정과 자아성숙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끌어올 수 있다는 말일까요?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이 제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책에 인용된 성경구절도 너무 공상적이여서 우리가쓰는 성경의 해석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거나
자신에게 알맞도록 바꿔서 풀이해놓았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는데요
누가 이단이냐 아니냐 판가름 하는 것도 말씀입니다.
말씀에 비추어 봤을때 옳은가 그른가가 이단의 판단 기준입니다.
민감한 부분인데요 잘 살피셔야 합니다.
그리고 묵상가운데 성경을 심도있게 접근하십시오.
예수그리스도만 얘기한다고 끝낼 부분이 아니라
정확한 복음을 제시하는지
인본주의 적인 신학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만으로 선전하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좁은 길이기 때문에 가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통해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이 자기의 죄와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게 끔 합니다.
복음을 명확하게 이해하셨다면 성공보다 오히려 포기와 희생과 가난의 길을
자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아파트 살고 떼돈 벌고 거부가 되어도 그것은 주님과 상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말씀대로 순종하길 결단하며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이 그리스도 인 입니다.
한국교회의 자성을 촉구합니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있을 수 있다는거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위해 과정을 희생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들 께서 속히 결단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솜사탕 복음 - 값싼 복음으로 정말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인간적인 생각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관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6&dir_id=60301&eid=OY55BVoMkxRsGIYzjnw0hIi93xxFsB4z&qb=wba/pCC/wL26xr4=&pid=fUdwFwoi5TGssbs2FTdsss--152716&sid=SXQwn6EYdEkAAAJcfbo에서...
# by | 2009/01/19 17:01 | 목회와 신학 - SML prjct | 트랙백 | 덧글(0)
개요
I. 그의 복음서 곧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룬 역사를 이야기, 요점 되풀이
이 책을 데오빌로에게 헌정함(1-2).
II.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들에 대한 요약과 함께 제자들과의 회의, 지
상에 40일 동안 계시며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들(3~5).
III.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그리스도의 담화, 승천하신 후에 천사가 제자들에게 한 말(6~11).
IV. 기독교의 시작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그리스도의 승천으로부터 성
령강림까지의 교회의 상태(12~14).
V. 유다의 죽음으로 인해 거룩한 모임에 생긴 빈 자리를 맛디아를 선출함
으로 채우는 일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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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이 구절에서 데오빌로가 상기되고 있다.
우리가 이 책을 공부하기 전에 누가복음에 시선을 줄 필요가 있다. 이로
써 우리는 중지된 곳에서 이 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알 수 있고, 뿐만
아니라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그들이 주님의 행적, 곧
그의 은혜로운 행적을 보면 사도들의 행적을 알 수 있다.
1. 누가가 이 책을 헌정하는 후원자는 데오빌로다(1). 이전에 누가가 복
음을 헌정하는 서신에서 그를 데오빌로 각하라고 불렀다. 여기서는 누가가
데오빌로여 라고만 부르고 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존귀함을 상실하였기
때문이 아니며 또는 그 존귀함이 줄어들고 저명함에 흠이 생겼기 때문도
아니다. 데오빌로가 어떤 직책을 가졌든지 아마도 직책을 내놓았을 가능성
이 높다.각하라는 호칭이 바로 그 직책 때문에 주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가 이제는 나이 많이 늙었을 것이며, 자신에게 과분한 그런 존칭을
싫어했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누가가 더욱 친해져서 보다 자유롭게 그에
게 말을 걸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독교와 이교도 저자들 모두 이처럼 그들
의 작품을 어느 특정한 사람들에게 헌정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성경 중에 일부를 이렇게 바친다는 것은 마치 구체적으로 우리의 이름을
적어 그것을 우리에게 보내는 양 우리 각자가 그것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
를 암시하고 있다. 먼저 쓴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우리의 배움을 위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2. 누가복음이 여기서 '내가 먼저 쓴 글'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억하면서 이 글을 주시하였는데, 이는 '톤 프로톤 로곤', 곧
먼저 쓴 말씀의 지속성과 확실성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기록된 복음은 입
으로 말한 것과 똑같이 참된 말씀이다. 아니 지금 우리가 알기에 우리가
믿을 수 있고 아울러 기록된 말씀과 일치하는 구전의 말씀은 없다. 누가는
이전에 글을 썼고, 이제는 거룩하게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저술한다. 그리
스도의 학생들은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안내자들
은 그들을 도와야하며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전의 수고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더 많은 수고를 하
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지금 여기에
나오는 누가처럼 이전의 수고에 의해 자극을 받고 격려를 받아야 할 것이
다. 누가는 먼저 쓴 글에서 기초를 세웠기 때문에 이제 그 기초 위에 사
도행전의 역사를 기술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저것을 배격하지 말자.
새로운 설교들과 새로운 책들로 인해 옛 것들을 잊어버리지 말고 도리어
옛 것들을 상기하고 활용하자.
3. 누가복음의 내용은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신' 모든
것이었다. 다른 세 명의 복음서 저자들의 주제도 동일하다. 다음의 사실
들을 관찰하라.
(1)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며 또한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교리는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의하여 확증되었다. 또한 그 놀라운
일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임을 입증하였다. 그리
스도께서 가르치신 의무들은 그가 행하신 거룩하고 은혜로운 일들 가운데
그대로 시행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
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본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임
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가
장 좋은 사역자들은 행하고 가르치는 자들이며, 그들의 삶이 지속적인
설교가 되는 자들이다.
(2)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셨다.' 예수께서는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행해야 하는 모든 것의 기초를 세우셨다. 그의 제자들
은 예수께서 시작하신 일을 계속 진행하여야 했으며, 동일한 것을 행하
고 가르쳐야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을 시작하셨고 사도들에게 맡
겨 계속하도록 하셨지만 아울러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로 행하고 가르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시작하신 복음의 사역을 감
당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3) 네 명의 복음서 저자들, 그리고 특히 누가는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자세한 모든
것을 다 전해 주었다면 온 세상은 그 많은 분량을 담아두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많고 다양한 모든 것들의 제목들과 표본들만 우
리에게 전해졌다. 우리는 이것들을 통해 나머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
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의 시작과 그의 표적의 시작을 본다. 누가가
비록 상세하게 모든 것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과
행하심에 대하여 이야기하였고 우리에게 그런 것들에 대한 전체적인 개
념을 알려주었다.
4. 복음서의 기간은 '승천하신 날까지'로 정해졌다. 그 후에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셨고, 그의 육체적인 임재는 복음서에서 더 이상 나타나
지 않았다. 마가복음은 '하늘로 올려지사'라는 말씀으로 끝나며, 누가
복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까지 행하심과 가르치심을
계속하시다가 마침내 승천하셨고 이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다른 일을
하셔야 했다.
II.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실을 옹호하며 증거한다.
먼저 쓴 글에서 이야기되었던 내용이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모든 경우에 반복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중요
한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셨고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들
은 정직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실이 그들의 증언에 달려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
듯이 문제는 그들이 과연 믿도록 강요당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아니다. 그들은 강요당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 증거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살아계심', 그리고 사신 분이 다른 이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
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다. 그리스도는 여러 번 반복하여 손과 발과 허리에 난 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
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2. 증거는 많았고 자주 나타났다.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항상 함께 거주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그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을 점점 더 만족시켜 주셨으며, 이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그들의 모든 슬픔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
리스도께서는 존귀와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신 이후에 오랫동안 지상에 계셨는데 이는 자기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해 주고 그들의 마음
을 위로해 주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겸손과 긍휼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이로써 '우리에게 있는 대제
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님'을 우리는 확실할 수 있다.
# by | 2009/01/02 20:17 | 목회와 신학 - SML prjct | 트랙백 | 덧글(0)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났고 그들과 많은 접촉을 가졌으므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로 부활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8에서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나타나신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기록이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나타나신 사건 전체를 포함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사이가 40일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곳은 여기 뿐이다. 제자들은 이 40일 동안 교제하며 가르침을 받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위해 준비를 했다. 40일 동안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가르치심
① 부활 전후의 교훈이 동일함
40일 동안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른 사역기간과
비교할 때 특별히 다르다거나 변화된 점이 없다.
물론 예수님께서 부활 생명을 가지시고 사역하신
새로운 사역이라는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예수님
께서 40일 동안 영광스런 부활체로 사역하신 것은
명백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은 부활 전이
나 부활 후나 동일한 것이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
의 사역이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동일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이었다(행 1:3).
여기서 부활 후의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신학적인
논증은 할 수가 없다. 즉 그의 부활 전과 후의 육
체적 차이점은 다른 기회에 논하는 것이 타당하다
고 생각된다(cf. 고전 15:35~49).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히 가현설Docetism을 뒷받침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 몸의 부활을 말한다. 여
기서 강조할 것은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
는 사실과 육체가 있는 몸으로 제자들을 접촉하셨
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육체
가 없는 귀신과의 만남이 아니었고 그들의 환상이나
꿈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은 어떤 비밀스런 것이 아니
었다. 고대 노스틱Gnostic은 예수님께서 이 시기에
정경의 기록에 포함되지 않은 비밀스런 교훈을 제자
들에게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다다케는 온유하고 탐욕이 없고 의로우신 주님에게
인정받는 합당한 사람으로 감독들과 집사들을 세우
라고 가르친다. 복음서에서 감독과 집사를 세우는
교회제도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반면, 디다케에 이
런 언급이 있기 때문에 다다케는 예수님이 부활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에 다른 교훈과 함께 교회
제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4세기의 산물인 시리아의 우리 주님의 언약에서는
승천 전에 예수님 자신이 교회 정치에 대해 가르쳤
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은 이들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
다.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부활 전과
같이 같은 주제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예수님의
가르치는 사역은 아직도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한
것이었다(1:3)
박형용, 사도행전 주해,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2003, 수원.
# by | 2009/01/01 19:05 | 목회와 신학 - SML prjct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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